결핵환우들의 어머니, ‘김은자 마리아’

김은자(1924~2002)마리아는 동광원 이현필 선생의 제자이다.
김은자 마리아는 김준호 선생의 지도하에 무등원 초창기부터 공동체 생활을 관리하였으며 신앙 또한 참으로 독특하고 열렬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함을 본받고자 이러한 신앙으로 먹을 것이 부족했던 당시 무등원의 식구들을 위하여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제중병원의 환우들이 먹다 남긴 밥과 누룽지를 얻어서 등에 짊어지고, 약 10Km가 넘는 험한 산길을 걸어서 결핵 식구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당시 상황에서 김은자 마리아의 헌신적인 사랑은 결핵환우들의 끼니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 광주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나오기도 했다.

김은자 마리아의 눈과 가슴에는 길거리에 있는 걸인이나 결핵환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작은 예수님으로 보였다. 그녀의 사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에 있든 굶주리고 아픈 영혼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몇 십리 길이라도 달려가서 그들을 데리고 왔다.

환자로 인하여 가족이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면 환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를 데리고 와서 함께 생활하도록 하였으며 김은자 마리아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말을 자주하였다.

무등산 곳곳의 움막집을 다닐 때나 밤중에 시내에서 산으로 돌아올 때 밤길을 두려움 없이 성가를 부르며 다녔으며 환우들을 찾아 제일 먼저 은혜실에 들러서 중환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으로 위로하며 밤늦도록 기도를 하였다.

환우들을 먼저 생각하였고 병이 깊어 식사가 어려운 환우들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섬기며 쌀과 고기를 구하여 기운을 돋게 하고 치료에 힘썼다.
각혈하다 쓰러진 환우들을 주저하지 않고 간호 해 주었고, 임종을 맞은 이들의 장례 일도 마다 하지 않았다.

또한 “강도 만난 자의 친구가 되어 준 사마리아인”(루가 10, 29~37)과 같이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옷이 없는 이가 있으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그 자리에서 흔쾌히 벗어 주었고, 신발이 없는 이에게는 자신의 신발을 벗어 주었다.

김은자 마리아는 1985년 3월16일 설립된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이사와 소화정신요양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다.
위암으로 오랫동안 투병생활하다 2002년 2월28일 선종하였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김천자 세라피나’ 어머니

김천자 세라피나는 1958년경부터 언니인 김은자 마리아에게서 동광원 이현필 선생을 소개받은 후, 이현필 선생의 말씀과 위력에 감화를 받아 동광원을 자주 찾게 되었다.
한 가정의 아내이며 4남매의 어머니인 그는 교직에 있는 남편과 사회적으로 자신이 받았던 달란트도 노래, 편물, 양재, 요리, 예절 등 어느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재다능하였다.
어머니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한 어린 자녀들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가슴깊이 묻고 희생으로 바치며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복음적 삶을 선택하였다.
그는 덕과 지식과 지혜를 겸비한 지도력이 뛰어났다.

김천자 세라피나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8:34)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
자신은 물론 봉사자들에게도 청빈 생활과 사랑의 공동체를 위하여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는 말씀으로 늘 충고와 격려를 하였다.

특별히 그는 이현필 선생의 선종 후에는 김준호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고 봉사자들을 지도하며 예수의 소화수녀회 창설을 위한 기초를 놓기 위해 물질적으로나 영적인 협력자로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소화데레사 성녀의 정신을 본받고자 무등자활원을 소화자매원으로 개명하기를 간절히 바라셨고 그 유지를 받들어 1981년 4월 1일 그대로 이루어졌다.

김천자 세라피나는 1977년 무등자활원 초대원장으로 가장 어려웠던 혼돈의 시기에 살림을 맡아 총 관리하면서 시설이 빚더미에 넘어갈 위기에 놓이자 수피아 여고 스승이셨던 조아라 회장과 동창 친구들과 함께 시설유지이사회를 구성하였으며 음악회를 열고 후원자를 개발하여 위기에서 구하였다.

그는 환우들에게나 봉사자들에게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가 되어 주었으며 자신들의 고충과 어려움 때문에 찾아오면 언제든지 마음을 나누며 위로해 주고 평화를 안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노숙인 이었던 환우 변재갑 형제와 장순자 자매는 매일 방 문 앞에 와서 어린아이처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힘들게 하여도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그 뜻을 다 받아 주었다.

또한 무등자활원 초대원장 시절 전북 장수에 지지리 분원, 광주시 북구 화암동에 무등산 분원을 설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특별히 무등자활원의 안정과 자립생활을 위해 혼신을 다하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1979년 3월 19 선종하였다.